바다가 다 내 거 같은 기분, 경북 영덕 고래불 해수욕장

고래불 해수욕장은 사실 경북권에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,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‘거기 어디?’ 소리 듣기 딱 좋은 미지의 땅이다. 그래서인지 심하게 붐비는 일도 거의 없고, 특히 평일에는 혼자서 리조트 광고 찍기 딱 좋은 분위기가 완성된다. 심지어 바닷물도 맑아서 '이게 동해냐 지중해냐'라는 어설픈 고민도 잠시 하게 된다.
근처에 있는 방파제나 작은 어촌 마을 골목길을 걷다 보면, 마치 내가 한 편의 시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도 든다. 물론 이건 내가 아직 커피를 안 마셔서 생긴 저혈당 증상일 수도 있지만, 분위기가 너무 좋다는 건 팩트다.
그리고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‘물가’다. 요즘 물가 미쳤다 미쳤다 하는데, 여기는 아직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가격대다. 회 한 접시 시켜도 서울보다 반값이고, 민박이나 작은 게스트하우스도 1인 숙박으로 3만 원대에 충분히 가능하다. 이쯤 되면 거의 사회 초년생의 통장 잔고도 지킬 수 있는 힐링 여행지라고 할 수 있다.
특히 ‘혼자 여행’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고래불은 정말 천국 같은 곳이다.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혼자서 바다 보고, 혼자서 맥주 마시고, 혼자서 별 보는 시간까지 완성 가능하다. 그리고 중요한 건,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. 나 혼자 있는데 누가 보겠는가.
갈매기 말고는.
현실판 '슬로시티', 전남 곡성 가정역 & 섬진강 기차마을
곡성 하면 다들 기차마을은 알지만, 그게 어디 붙어 있는지는 모른다. 바로 그 ‘모른다’는 점이 우리가 좋아할 이유다.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건 곧 조용하다는 뜻이고, 조용하다는 건 내 멘털이 조용히 회복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.
곡성의 가정역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간이역 중 하나다.
평일에 가면 심지어 역사 안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가 있다. 기차가 와도 내리는 사람도 없고, 타는 사람도 없다. 이쯤 되면 이건 역이 아니라 그냥 레트로 감성 포토존이다. 아무리 셀카를 못 찍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. 주변 풍경이 사진빨을 무지막지하게 받기 때문이다.
가정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섬진강 자전거길이 나온다. 자전거를 안 타도 좋다. 천천히 걸으며 '도대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'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, 그동안 정신없이 살아온 내 일상과도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. 슬로시티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. 여긴 진짜로 시간이 느리게 간다. 아니, 어쩌면 내 인생이 너무 빨랐던 걸지도 모른다.
근처에는 섬진강 기차마을도 있는데, 이곳은 약간의 유원지 감성이 섞여 있다. 하지만 평일에는 거의 '직원 대 손님 1:1 비율'이라서 탈 것도 혼자 전세 낸 듯 탈 수 있고, 기관차 테마 숙소 같은 독특한 숙박도 저렴하게 이용 가능하다.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, 여전히 도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. 와이파이는 잘 터지는데 마음만큼은 오지에 온 느낌이다.
여행의 참맛은 결국 ‘여백’에서 온다고 믿는 사람이라면, 곡성은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다. 물론 너무 느긋하게 있으면 다시 서울 돌아가기가 싫어지는 부작용도 있다. 전원생활 로망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.
도시와 자연 사이의 묘한 경계, 충남 서천 마량포구
서천 마량포구는 딱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. 도시 같으면서도 도시가 아니고, 시골 같으면서도 시골이 아닌. 이게 무슨 말이냐면, CU는 있지만 사람이 없다. 카페는 있지만 웨이팅은 없다. 횟집은 많은데 손님은 없다. 이 정도면 거의 여행자가 혼자 즐기기 딱 좋은 병맛 밸런스라고나 할까?
마량포구는 해 질 녘이 진짜 하이라이트다. 서해 쪽이다 보니 일몰이 그냥 ‘끝판왕’이다. 구름이 잘 껴주면 보너스 필터 효과가 자동으로 들어가고, 파란 바다와 붉은 노을이 섞이면서 '이거 실화냐' 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. 사람 적은 평일에 가면 일몰 독점은 기본이다. 그 자리에서 유튜브 브이로그 하나 찍어도 좋을 정도의 퀄리티다. 편집은 귀찮으니 그냥 기억에만 남기자.
근처에는 국립생태원이나 장항 송림산림욕장 같은 자연 속 힐링 장소들도 많다. 심지어 이 모든 게 차로 10~15분 거리다. 택시 타도 큰돈 안 드는 거리니 대중교통파에게도 부담이 없다. 그리고 특이하게 이 동네에는 조용한 카페가 꽤 많다.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수준의 널찍한 공간에, 사람은 나 포함 두 명 있는 그런 카페. 콘센트도 많고 와이파이도 잘 터진다. 원하면 여기서 원격근무도 가능하다. 물론 과장이 오면 ‘잠시 자리 비웠습니다’ 메모 남기고 다시 일몰 보러 나가야겠지만.
물가도 부담 없다. 서울 기준으로는 커피 한 잔 가격에 간장게장 백반이 나오는 마법이 펼쳐지기도 한다. 어쩌다 먹은 밥이 이렇게 맛있고 저렴하면, 잠시 ‘서울 물가가 비정상이야’라는 철학적인 고민까지 하게 된다.
이 세 곳은 평일에 혼자 가야 진가를 발휘하는 여행지들이다. 사람이 없고, 경치는 좋고, 가격까지 착한 완전체들이랄까. 주말이면 북적일 수 있지만, 우리가 바라는 건 바로 그 ‘한가함’ 아닌가. 세상과 잠시 멀어지고 싶을 때, 휴가 쓰고 몰래 도망치듯 떠나도 후회 없는 곳들이니, 어딘가에 ‘나만 알고 싶은 여행지’를 찾고 있다면 이 리스트에서 골라보시길. 그리고 다녀와서 ‘여긴 진짜 별로더라’고 소문내서 계속 조용하게 만들어주자. 그래야 다음에도 또 가니까.